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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days.....

잃어버린 독립운동가 "차강 박기정"을 조명해 봅니다.

by 하늘초롱 2016. 1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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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강 박기정(1874~1949) 의병운동 앞장선 불세출 書畵家

 

잃어버린 독립운동가 "차강 박기정"을 조명해 봅니다.

 

 이효석의 소설 '메밀꽃 필 무렵'의 무대 평창군 봉평면. 뙤약볕이 내리쬐는 봉평면 들판에는 '메밀꽃'대신 고랭지배추가 옹기종기 앉아있다.
 봉평면 소재지에서 북쪽으로 10여분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나오는 덕거리도 온 마을사람들이 손을 모아 고랭지배추 수확에 한창이다.
 서당이나 고건축물을 찾아볼 수 없는 여느 농촌과 다름없는 이곳이 강원도의 대표적인 서화가 차강 박기정 선생이 거주하며 불세출의 서화작품을 그려냈던 묵향(墨鄕)이다.
 그러나 지금은 박기정 선생의 생가는 몇차례의 개축으로 본래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후손들도 서울과 강릉 등으로 이주했으며 박기정 선생을 어렴풋하게 기억하는 마을 노인들도 몇 남아있지 않다.
 평창을 대표하는 소설가 이효석의 그늘에 가려 빛을 보지 못하고 있는 차강 박기정 선생. 차강 박기정 선생에 대해 연구하는 지역 향토사학자나 고미술연구가조차 없어 생가터만큼이나 쓸쓸히 기억에서 사라지고 있다.
 서화가로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차강 박기정 선생의 업적을 되살리기 위해 '8월의 자랑스런 강원문화인물'로 선정, 생애와 작품들을 조명해본다.

                                                                                                 <금니매화 8폭병풍>


성품 엄격·강직… '사군자' 즐겨 그려

 박기정(朴基正)선생의 자는 일원(一元), 호는 차강(此江) 또는 강재(江齋) 강옹(江翁)이라 했는데 주로 '차강'을 많이 썼다.
 차강의 본관은 강릉으로 1874년 8월13일에 태어나서 1949년 1월27일에 별세했다. 향년 75세였다.
 순조에서 철종때까지 영의정을 지낸 권돈인이 차강의 고조부 박형호에게 학문과 글씨를 배웠던 인연으로 차강은 어려서부터 권돈인의 문인으로부터 글씨를 배웠다고 한다.
 차강이 세상에 드러나게 된 것은 18세 되던해(1893년) 양양 낙산사에서 열린 전국 한시백일장 휘호경시때다.
 몇달 동안 두문불출하며 글씨연습에 전념한 차강이 이 대회에서 장원을 차지함으로써 '동대문 밖에서는 박기정을 따를 사람이 없다'는 칭찬을 듣게 된다.
 선생의 남아있는 작품을 보면 글씨에서는 행서가 특히 뛰어나며 예서와 초서에 능했다. 선생의 글씨에는 '기', 즉 '정신'이 살아있어서 글자 그대로 '기운생동(氣韻生動)'하는 작품들이며 성품이 고스란히 나타나고 있다.
 차강의 작품에는 글씨보다 그림이 훨씬 많은데 그림 중에는 사군자가 가장 많다. 고종의 왕세자 시절 스승을 지내고 유명한 해강 난죽도를 쓴 김규진은 차강을 만난 자리에서 차강의 난을 보고 '죽(竹)은 내가 낫고 난(蘭)은 자네가 낫네'라고 평할 만큼 탁월했다.
 그 밖에 약간의 괴석도(怪石圖) 포도도(葡萄圖) 노송도(老松圖)가 있고 산수화는 극히 적어서 2∼3점 밖에는 알려진 것이 없다.
 차강이 매·난·국·죽의 사군자를 가장 많이 그린 것은 선생의 고고한 기질과 관계가 있다. 선비들은 고고함과 절개가 선비의 기본 정신이라 해 그 상징인 사군자를 많이 그렸는데, 차강도 꼿꼿하고 엄격한 선비 기질을 타고난 사람이어서 사군자가 성품에 맞았기 때문일 것이다.
 또 서화 작업중에 옆에서 덜그럭거려 방해가 되면 당장 불호령이 떨어졌고 어쩌다 밥에서 돌이 씹히면 몇시간씩 훈계를 했다고 한다.
 이같이 엄하고 급한 차강의 성격을 알려주는 일화가 있다.
 일제강점기 일본인 지방관리 한 사람이 차강의 글씨를 보고 '조선에도 이같은 명필이 있느냐'고 탄복해 선생을 찾아와 거드름을 피우면서 글씨 한 폭을 청하였는데 그 태도에 분노한 차강이 벽력같은 목소리로 '이 글씨가 어떤 글씨인데 그런 태도로 달라느냐'고 소리치며 옆에 있는 채찍을 들고 후려갈기려 하자 일본관리가 혼비백산해 줄행랑치고 말았다 한다.
 쫓겨갔던 일본관리는 얼마뒤에 다시 와서 무릎을 꿇고 자신의 무례를 사죄하고 정중하게 글씨를 청하니 그제야 노여움을 푼 차강은 '비록 일본인이지만 내 글씨를 볼 줄아는 안목이 가상하다'며 글씨 한 폭을 써 주었다 한다.
 선생을 어렴풋하게 기억하고 있는 박주택씨(67·평창군 봉평면)도 한 가지 일화를 기억하고 있다.
 선생이 방안에서 글씨를 쓰고 있을 때 또래 몇명과 마당에서 떠들며 놀다 방으로 불려가 혼쭐이 났다고 한다. 몇시간째 땀을 흘리며 정성스레 간 먹물을 선생이 대붓으로 한번 찍으면 모두 말라 버렸으며, 선생은 이 먹물로 다섯 자짜리 글을 썼다는 것.
 차강의 성품이 엄하고 원칙론자였기 때문에 그에게 학문이나 서화를 배우려는 제자들이 버티지 못하고 떠나 계승할 제자가 별로 없었다.
 또 차강은 당대 뛰어난 서화가였을 뿐 아니라 애국자며 독립지사였다.

문화 암흑기 '한국 魂' 담긴 작품 남겨

 21세때인 1895년 한말의병이 일어날 때 영월, 평창, 정선 지역에서 활동했던 의암 유인석의 의병부대에 가담해 싸웠으며 평창의 대화, 봉평 등지에서 의병을 모집할 때도 앞장서서 활약했다고 한다. 차강의 서궤에 김구, 이승만, 여운형 등에게서 온 서찰이 수백통씩 보존돼있는 점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차강의 일생은 어찌보면 불운한 일생이었다고 할 수 있다. 조선왕조가 멸망해가는 조선말기에 태어나 일제 강점기에 살면서 그의 학문과 뜻을 펴보지도 못한 채 시주(詩酒)와 서화(書畵)로 울분을 달래며 일생을 보냈고 1945년 광복 후에도 혼란한 시대에 뜻을 펼 겨를도 없이 1949년에 세상을 떠나 안타까운 한평생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가 남긴 많은 서화작품이 있어서 수준높은 서화가였음을 알려주고 있고 또 선생의 학문과 인품과 지조를 알려줌으로써 자신이 이 세상에 나왔던 보람을 남기고 후세에게 교훈과 즐거움을 주고 있어 그의 일생이 불운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차강의 제자로는 청강(靑江) 장일순(1928.9.3∼1994.5.22)과 화강(化江) 박영기(81)가 있다.
 화강 박영기는 차강의 손자로 9세 때 서화에 정식입문해 석파 대원군의 난(蘭)법을 사사받아 일가를 이뤘다. 이율곡선생 경축제백일장 휘호대회 장원, 한국미술제 사군자 대상 수상, 한국미술공모전 서예대상 등을 수상하는 등 차강의 예술혼과 맥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추사 김정희와 대원군의 난법을 터득했으며, 묵죽(墨竹)은 탄은 이정의 경지에 도달해 속세의 기인으로 불리고 있다. 지금까지 독신으로 서울에서 살며 고령인데도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청강 장일순은 원주의 선각자인 여운 장경호의 손자로 많은 후진을 양성한 교육자이자 사회운동가였다.

[인터뷰] 정석진 평창문화원장

 박기정(朴基正)선생의 자는 일원(一元)이고 호는 차강(此江) 또는 강재(江齋) 강옹(江翁)이라 했으나 '차강'이 가장 널리 알려진 박기정의 호(號)이다.
 차강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신동이라 불리었지만 차강이 후일 서화(書畵)로 일가(一家)를 이루어 명성을 날리게 된 것은 타고난 재질뿐만 아니라 각고의 수련과 굳은 의지가 결정이라는 것을 잊을 수 없다.
 차강이 16세 되던해 스승인 권돈인(철종때 영의정)이 차강을 불러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으니 이제는 내곁을 떠나 벼슬길에 오를 때까지 다른 곳에서 더 학문에 몰두하라"고 하니 차강은 강원도 강릉을 택하게 된다.
 그러나 차강은 가솔들을 이끌고 강릉이 아닌 평창군 봉평면 덕거리에 짐을 풀게 된다.
 이는 강릉과 원주 또는 서울로 이어질 수 있는 길목인 봉평을 택한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훗날 차강은 강릉 선교장(船橋莊)에 몇달씩 머물며 시주(詩酒)를 함께 하고 서화도 그렸다고 하며 차강의 수작서화가 여러점 선교장에 남아있다.
 또 차강의 제자라고 할 수 있는 사람으로 청강 장일순과 화강 박영기를 들 수 있는데 청강 장일순을 제자로 받아들인 연유에서도 차강이 왜 봉평에 터를 잡았는 지 알 수 있다.
 청강은 구한말 원주지역 자산가로서 육영사업을 펼쳐 원주에 여러개의 교육기관을 설립한 여운 장경호의 손자로 차강은 여운과 친분을 맺어 해마다 한두번 여운의 집으로 가서 10여일 또는 한달여씩 머물며 손자 장일순에게 서화를 가르쳤다고 한다.
 차강은 봉평에 거주하면서 강릉 선교장과 원주 장경호의 집에 몇달씩 머물며 문인들과 교류를 했으며 작품활동을 벌였던 것이다.
 그러나 차강이 원주와 강릉, 특히 강릉에서 많은 활동을 하다보니 자연 평창에는 그와 관련된 유품 등이 전해져 오지 않고 있다.
 또 후손들도 강릉과 서울 등지로 흩어져 살고 있는데다 생가터마저 수십년이 흐르면서 본래의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없게 됐다.
 평창문화원은 소설가 이효석과 함께 불세출의 서화가 차강 박기정 선생을 평창이 자랑하는 인물로 추앙하기 위해 이제부터라도 많은 자료를 확보하고 연구에 매진할 것이다.

[출처 : 강원 도민일보 http://www.kado.net/news/articleView.html?idxno=10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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